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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3월의 독립운동가 – 프랭크 스코필드[ Frank W. Schofield ]
2016-03-27 16:44:41, 조회 : 406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


  1889년 영국 럭비(Rugby)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1907년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토론토 대학 온테리오 수의과를 졸업하였다.
1916년 당시 한국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교장으로 있던
에비슨(Avison, O. R.)의 초청으로 세균학 교수로 한국에 들어왔다.
영어로 강의를 하다가 한국어를 공부하여
1917년 한국어 시험을 보아 합격하고 선교사 자격도 받았다.
한국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성을 음차하여 석호필(石虎弼 - 단단하고 무섭고 남을 돕는다는
자신의 철학이 담김)이란 한국어 이름을 가졌다.  

  1919년 초 미국에서 온 샤록스(Alfred M. Sharrocks)란 친구로부터,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할 것이라는 소식에 따라,
미국에서 이승만, 안창호 등이 독립운동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갑성(李甲成)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한국에서도 모종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언질을 주어 3·1운동을 지피는데 한 역할을 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현장을 직접 카메라에 담고
독립운동의 실상을 체험하여 기록하였다.
그리고 피해를 당하는 학생들을 영국인이며 캐나다인 신분을 이용하여 구출하고,
일본 경무국장과의 친분관계를 도용하여 구출하기도 했다.
음력 3월 1일이 되자(양력 4월 1일) 제2의 3·1운동이 지방에서 일어났다.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군 책임자가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마을 주민들에게 알릴 사항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여
제암리 교회에 모이도록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작은 교회에 들어오자 문을 잠그고 총을 난사하고 불을 질러
26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1919. 4. 15).
이 사건이 알려지자 스코필드는 삼엄한 경비를 서는 일본 경찰을 따돌리고
수원에서 자전거로-스코필드는 소아마비 증세로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한쪽 다리로 자전거를 배워 탔다- 제암리까지 잠입하였다(4. 18)
거기서 또 일본 경찰을 만났으나 몰래 제암리의 총살·방화 현장을 촬영하는데 성공하였다.
부근의 수촌리(水村里), 화수리(花樹里)의 방화 만행 현장도 둘러보고 귀경하였다.  

  스코필드는 3·1운동을 체험하고 사진으로 담은 산증인임과 동시에 한국인을 여러모로
보살피고 언론활동으로 일본의 만행을 해외와 국내에 고발하는 활동을 하였다.
수촌리에서 일본 경찰에 구타당하여 몸을 심하게 상한 사람을
다음날(4. 19) 다시 내려가 수원 관비병원에 입원시키는 의리를 지켰다.
일본의 제암리 만행과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캐나다나 미국으로 나가는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해외에 보도토록 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상이 폭로되었고,
일본의 언론에서도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질타의 기사가 나왔다.  

  일본인이 한국에서의 일본의 선행을 외국인에게 홍보하기 위한 어용 영자신문
《Seoul Press》에 일본의 만행을 비난 고발하는 글을 무기명으로 자주 실었다.
수원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이완용(李完用)과 조우하였다.
이완용이 “어떻게 하면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소?”라고 괴로운 심경으로 묻자,
“이천만 국민에게 사죄해야 될 수 있소.”라고 대답했다.
일본 고지마[小島] 장군, 사이토 마코토[濟藤實] 총독 등을 만나
일본의 만행·고문 등을 비난하고 삼갈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서대문형무소, 대구형무소 등을 다니며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등
독립운동 수감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문하였다.
그들의 투쟁정신에 감탄하여 그가 쓰고 모은 독립운동 기록물에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Fire)》이라고 명명하여 훗날 한국인들이 출간해주었다.

  스코필드가 한국인을 돕는 것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되었다(1920).
그는 이때에도 총독에게 탄원하여 감옥에 갇혀있던 독립운동가인
이상재(李商在), 이갑성(李甲成), 오세창(吳世昌) 등을 면회하고 격려하였다.

  그는 캐나다로 건너가 대학교수로 활동하다가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며 한국을 잊지 못했다.
그의 3·1운동 역사 기록과 사진을 한국에 기증하여 보도되었다.
1958년 대한민국 건국 10주년 기념식에 초빙되어 내한하였고,
196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고, 1968년에는‘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강의하였고,
1969년부터 한국에 영구 정착하여 여생을 한국에서 마쳤다.

1970년 외국인 최초로 한국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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