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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마지막 특사 이준의 구국운동
관리자  2012-07-07 16:37:34, 조회 : 2,123, 추천 : 372

[사람이 산다 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

- 그렇다.
분명한 대의 (大意)를 위한 죽음은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길이 남는다.
이에 대한 정리와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후손으로서 최소한 예의이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거룩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은 오늘날 우리를 지탱하는 정신적인 지주 (支柱 )이자
미래로 나아가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 할아버지 슬하에서 강인하게 성장하다

- 열사는 1858년 12월 18일에 함남 북청군 속후면 중산리 발영동에서
부친 이병관과 모친 ‘청주이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한창 발동하던 4살에 양친을 모두 잃고
조부님 보살핌 속에서 외롭게 자랐다.
13세에 향시 (鄕試)에서 두각을 나타낼 만큼 명민한 청소년이었다.
주위로부터 잔뜩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8세에 상경하여 북청물장수의 '수도방가' 에 기거하면서
흥선대원군과 김병시 .최익현 등을 만날 정도로 담대했다.
김병시는 그를 문객으로 받아드리는 한편
북해상에 빛나는 옥같은 존재가 되라는 의미로 해옥 (海玉) 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접촉한 인물에서 알 수 있듯이 법관양성소에서 신학문을 수학하기 이전까지
충군애국론자였다.
개항에 대하여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 계몽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다

- 독립협회는 자주독립과 민권신장 등을 표방하면서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시의적절한 사무책임에도 수구세력은 이를 무조건 비판했다.
입헌군주제를 표방한 만민공동회 활동도 초기와 달리 탄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다만 이러한 경험은 변혁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시키는 계기였다.
이상재. 민영환. 정순만 등과 모색한 여러 개혁 방안은 실패를 거듭했다.
결국 한성감옥으로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러일전쟁 발발 이후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대한제국의 '엄정한' 국외정립 선언에도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몰렸다.
이어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등 일본인 발호도 만만치 않았다.
보안회 조직으로 일단 급한 사태는 수습할 수 있었다.
일진회의 친일행위에 맞서 공진회와 헌정연구회도 조직하는 등
민족정체성 유지에 앞장섰다.
을사늑약에 반대한 '7충신' 추도회 개최도 이러한 의도 속에서 이루어졌다.
국민교육회의 의무교육을 통한 '참된 한국인' 양성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정부 시책에 대한 비판은 구금과 투옥으로 점철되었다.
8개월에 불과한 평리원 검사생활은 이를 반증한다.
부인 이일정은 부인상점을 경영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 대한제국 운명을 외교활동에 호소하다

- 포츠머스조약 채결 소식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제의 의중이
한국의 식민지화임을 간파했다.
귀국 후 민영환과 상의한 다음 상하이(上海)에서 민영찬. 헐버트 등을 만나
일제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려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민영환 자결 소식에 급거 귀국하여 전덕기. 최재학 등과
을사늑약 반대운동 등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 개최 소식을 듣고 전덕기. 이회영. 이동휘 등과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는 고종황제를 비밀리에 만나 윤허를 받았다.
남대문역~부산항~블라디보스토크~페테르부르크를 경유하여
회의장소인 네덜란드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특사 3인방인 이상설. 이준. 이위종은 도중에 페테르부르크에서
전 러시아주한공사 파브로프의 주선으로 니콜라이 2세에게 고종황제 친서를 전달하였다.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상황이 예상되었다. 최소한 여기까지는....


. 양육강식이 지배하는 현실에 실망하다

- 현장은 만국평화회의라는 명칭에 전혀 걸맞지 않았다.
만국공법을 앞세우는 열강은
자국 이익을 쟁취 하는데 여념이 없는 '아수라장' 이나 다름없었다.
약소국의 운명은 단지 저들의 필요성에 따라 흥정에 이용되는 대상일 뿐이었다.
일부 양심적인 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초청되어
'한국의 호소'로 열변을 토하는데 그쳤다.
'공허한 메아리만' 회의장 주변을 맴돌았다.
완전한 배신이었다.
이역만리에서 겪는 분노는 스스로 억누르기에 힘겨웠다.
좌절감과 피로감도 일시에 몰려왔다.
1907년 7월 14일 현지에서 열사는 분사하였다.
대한제국의 완전한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을 염원하면서 !!!


                                                                     월간 독립기념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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