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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에게 비수를 꽂은 이재명의 영원한 동반자 – 오인성
관리자  2016-01-17 17:30:05, 조회 : 997, 추천 : 88

이완용에게 비수를 꽂았던 이재명과
그의 부인이자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독립운동을 했던 오인성.
이재명이 조국의 이름으로 변절자들을 처단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오인성의 도움과 응원이 있었다.
남편이 구속되어 있을 때도 뒷바라지를 하고,
남편이 순국한 뒤에는 그의 유지를 받들어 일본과 싸웠던 오인성.
그녀와 이재명 부부의 특별한 인연과 삶을 소개한다.



-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 암살을 도모하다

1909년 12월 23일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역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지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재명은 동지들과 평양에서 일진회 합병청원에 분개하여
이완용, 이용구 등 암살을 계획하였다.
이날은 종현 천주교당(현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이재명은 행사에 참석하고 나오는 이완용을 습격하였으나
중상을 입히는데 그치고 말았다.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하려는 일본경찰과 격투가 벌어져 아수라장이 되었다.
즉시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재판정에서는 방청객들에게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고
일장연설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물었다.
곧바로 “2000만 민족”이라 대답하는 등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에 방청객들이 “옳다!”고 소리치며 재판정 유리창을 깨는 등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 .이재명이 귀국하다

이재명은 평북 선천 출생으로 8세에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이사했다.
일신학교를 졸업한 후 14,5세 되던 해에 노동이민 모집에 응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현지에서 공립협회 지도자인 안창호(安昌浩) 등의 지도로
불타는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키웠다.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기울자 순절하는 인사가 속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였다.
이에 귀국하여 국내에서 국권회복을 도모하기로 결심했다.

이재명은 귀국길에 한인들이 많이 사는 블라디보스톡을 찾았다.
그 곳에 머무는 동안 평양 성모여학교 교사 함마리아 오빠를 만났다.
1907년 평양으로 돌아온 즉시 함마리아를 방문하여 오빠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는 혈혈단신이라 그녀를 누나와 어머니처럼 의지하면서 지냈다.
이재명은 시시각각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다가오자
이를 비난하는 글을 신문에 투고하였다.
“정의에 입각시키고 민족의 애국심을 촉구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인줄 안다.
이런 일에 용감하지 못한 붓대는 차라리 꺾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담력을 키우기 위하여 동지 김병록과
토왜(土倭, 일본인에게 토지를 파는 중개인)를 살해한 후 서울로 피신하였다.
장모는 피신자금을 지원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활동을 일제가 탐지하자 연해주로 잠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1909년 겨울, 서울로 돌아와서 평양에 내려가 동지들을 만났다.
암살계획을 실천에 옮기고자 각자 임무를 분담한 후 서울로 왔다.



- .오인성, 이재명과 부부의 인연을 맺다

정미업으로 부를 축적한 오달문(吳達文)의 맏딸로 태어난 오인성(吳仁星)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으로 주위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성모여학교 입학 후 원만한 성격과 우수한 재능을 발휘하며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교사인 함마리아는 오인성의 어머니 김정은(金貞恩)과 친형제처럼 지내는 가까운 관계였다. 함선생은 오인성 어머니에게 이재명을 사위로 삼기를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소개를 받은 직후 이들 사이에도 사랑의 싹이 텄다.
1907년 겨울 이들은 부부인연으로 이어졌다.
당시 이재명은 21세이고, 오인성은 17세였다.
신혼시절 오인성은 재령군 나무리 진초동에 있는 사립진초학교에 재직하고 있었다.
여성교육 보급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이를 가능케 하는 에너지원이었다.
이때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남편 이재명이 와서 단총으로 오인성을 위협해
인성은 학교일을 못하고 어느 집에 피신해 있었다.
이재명은 매국적신을 모조리 죽인다고 부르짖으면서
미쳐 날뛰며 발포하여 동네가 소란스러웠다.”고 기술되어 있다.

오인성은 1909년 서울로 와서 청진동 양심여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에 정진을 거듭했다.
이재명사건 다음날 오인성도 경찰서로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강요받았다.
재판을 받는 동안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남편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에도 결국 남편은 순국하고 말았다.
남편 유지를 받들어 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후 중국 지린성(吉林省)과 상하이 등지로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후원하는데 앞장섰다.

오인성은 3·1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단서가 잡히지 않아 석방되었으나 미행과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다시금 망명을 도모하던 중에 우연히 병을 얻어 29세에 요절하였다.
오인성은 독립운동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녀의 남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지원은
을사오적에게 단죄를 되묻는 이재명 의거로 이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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