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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죽어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리라
관리자  2015-07-27 15:18:51, 조회 : 1,038, 추천 : 124

많은 사람들이 윤봉길·안중근 의사와 같은 남성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표 여성 독립운동가를 뽑으라 하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만큼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식과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남성들 못지않은 카리스마로
일본 형사마저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던 인물,
죽는 그 순간까지도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바랐던 독립운동가,
김경희를 소개한다.


- 신교육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가정환경이나 어린 시절을 알려주는 자료는 드물다.
김경희도 마찬가지다.
평양 출신이라는 사실과 개화한 집안 출신으로 동생과 함께
기독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은 부분만 알 수 있다.
주요 교과목은 찬송·성경 암송·산술·지리 등이었다.
김경희는 1903년 제 1회로 학교를 졸업한 후
동기생 김유선 등과 함께 숭의여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장로교 선교부에서 설립한 중등교육기관으로
입학생 43명 중 23명은 시골 출신이었다.
교과목은 성경·기독교리·산술·지리·물리·화학·수예·음악 등으로 편성되었다.
학기는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4개월간이었다.
1906년 감리교가 학교 운영에 참여하는 등 ‘초교파적’인 학교로 발전을 거듭했다.
1908년 졸업한 후 3년 동안 모교에서 수학과 지리 과목을 가르쳤다.
이후 목포 정명여학교와 평양 숭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김경희의 민족의식은 충만해졌다.

다음 일화는 민족의식으로 충만한 김경희의 마음을 보여준다.
『한번은 지리 시간에 ‘하얼빈’이 나오자
이곳이 바로 안중근 의사가 우리나라의 원수인 이등박문을 쾌살(快殺)한 곳이라고
설명하고는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에는 이곳에다 안 의사의 동상을 건립하자는 말을 하였다. 학생들은 수업을 감격과 울분이 교차하면서 숨죽이고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애국적인 언동에 감동되었다.
그러나 수업내용이 일년 만에 발각되고 말았다.
경찰에 끌려가 수주일간 감금된 채 온갖 악형을 받아야 했다.
김경희는 악형을 이기지 못하고 심한 폐질환에 걸려 병석에 눕고 말았다.』

열성을 다하는 교육은 여학생들에게 잠재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영웅담은 한민족에 대한 자긍심 고취로 귀결되었다.
3·1운동 당시 여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활동 등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 송죽형제회 조직으로 독립운동 지원에 나서다

1913년 김경희는 송죽회(松竹會)를 결성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황애덕·이효덕·안정석 등 숭의여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등을 망라한
비밀결사체를 조직하였고 김경희는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회비 명목으로 일정한 금액을 거두어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려는 의도였다.
졸업생 중 이혜경은 원산, 세매물은 부산, 박현숙은 전주, 황애덕은 서울 등지에서
교회와 기독교학교 여학생을 중심으로 신앙동지회와 기도 모임을 통하여
조직 확대를 도모할 수 있었다.
1919년 2월 하순 상해에서 온 김순애는 부산과 서울 등지를 거쳐 평양에 도착하였다.
동생 희애를 통하여 김순애를 만날 당시 그녀는 결핵을 앓고 있는 환자였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양지역 동지들을 만나는 한편
송죽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평양 만세운동 계획을 주도하였다.
김순애가 상해로 떠나는 2월 28일 저녁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작은 성경책을 주면서
“제가 내일 외출하여 집에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만일 제가 죽지 않고 적의 옥중에 들어가게 되면 이 성경을 들여보내 주십시오.” 라며
담담한 심경을 피력하였다.
3월 1일 평양 만세시위는 남산현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송죽회 회원들은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배포를 담당하는 등
분위기를 확산·고조시켰다.


- 임시정부와 국내 여성운동세력과 소통을 도모하다

김경희는 만세운동 직후 곧바로 상해 망명길에 올랐다.
도중에 김원경을 만나 이내 절친한 동지가 되었다.
도착 직후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동시에 애국부인회 조직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김경희의 상해 체류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김경희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여 국내 귀환을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임무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평양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이자 비밀결사체인 여성단체 결성이 아닌가 짐작된다.

1919년 8월경 귀국한 김경희는
평양 감리교와 장로교 애국부인회 통합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두 단체 통합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건강은 계속 악화되어 안타깝게도 9월 19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이 32세인 독신녀였다.
임종 직전에는 어머니와 동지들에게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겼다.

“나는 독립을 못 보고 죽으니
후일 독립이 완성되는 날 내 무덤에 독립의 뜻을 전해주시오.
나는 죽어서도 대한독립의 만세를 부르리라.”

김경희가 그녀를 감시하던 형사를 적개심이 가득 찬 눈길로 응시하자
형사가 나가면서 가족에게 “90년은 더 살겠소.”라고 말할 만큼
독립에 대한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
비록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 육신은 떠났으나
그녀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동지와 제자들을 통하여 계승되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강고한 인습과 민족적 차별에도
여성들의 광복을 향한 열정은 결코 반감되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역정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월간독립기념관 7월호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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