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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학, 북간도 항일운동을 견인하다
관리자  2015-06-12 20:32:19, 조회 : 1,026, 추천 : 91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던 시절,
교육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항일의식과 더불어
자주의식·독립정신을 심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영학 선생은 교육을 통한 항일의식·독립정신 고취에
더욱 큰 노력을 기울였다.
교육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던히 애썼던 선생의 활동을 되돌아본다.



- 한인들 민족교육과 자치운동을 펼치다

  러일전쟁 발발과 을사늑약 체결 전후로 국망에 대한 위기의식은 점증되는 분위기였다.
일부 의병장이나 계몽론자들은 국외에서 중장기적인 독립전쟁에 대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신민회 인사들을 비롯한 종교계 선각자 등이 추진한 국외독립운동기지건설은
이를 반증한다.
1906년 10월 설립된 최초 근대적인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
소망과 달리 서전서숙은 일제 탄압으로 1년 만에 폐교되었다.
하지만 국권의 수호와 회복을 위한 민족교육에 대한 관심사는
크게 증폭되는 계기를 맞았다.
동시에 이주한인 권익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자치운동도 모색되었다.
1909년 조직된 간민교육회는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대표적인 단체였다.
신해혁명에 의해 민주공화제를 지향하게 된 중화민국 탄생은
한인사회에 대단한 충격이었다.
이에 부응하여 자치문제가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간민교육회를 이끈 이동춘·김약연·김립·김영학 등은
한인자치를 위하여 신속하게 대응하였다.

  1913년 2월 이들은 한인자치기관인 간민회 조직을 결의한 후
중국 지방정부 인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12월에 길림도독은 간민회 설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희망찬 미래에 대한 전망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일제회유와 중국탄압, 이주한인을 둘러싼 중일 양국의 갈등,
간민회와 농무계의 대립 등으로 1년 만에 해산되었다.
다행히 만인계·장업회·동제회·동성한족생계회 등 여러 단체로 분화되는 가운데
대한국민회로 계승되었다.
3·13용정만세운동이나 1920년대 항일투쟁은
이러한 소중한 역사적 경험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



- 계몽활동가로서 의병운동을 지원하다

  김영학은 1871년 7월 2일, 함북 명천에서 출생하여
1944년 7월 13일 북간도에서 사망하였다.
호는 백하(白下)이다.
그는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사승 관계 등은 거의 알 수 없다.
당시 함경도는 율곡 이이와 우암 송시열에 의하여 정립된
‘서인-노론’ 학맥을 계승하였다.
19세기 후반 함경도를 대표하는 유학자는 김노규와 김정규였다.

  이들은 소중화주의에서 벗어나 유연한 사고를 견지한 인물이었다.
김영학은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07년 대한자강회난 서우·서북학회활동은 이와 같은 인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대한협회 경성지회 조직과 활동도 마찬가지였다.
김영학은 경성지회 총무로서 실질적인 운영을 주도하였다.

  지회원들과 더불어 읍내에 국문야학 설립을 지원하거나
함경도를 대표하는 사립함일학교 교장으로 근대교육 보급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교사들의 열성과 효과적인 교수법은 함북일대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칭송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전개된 의병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자금과 군수품 모집을 주도하였다.
군자금은 학교후원비라는 명목으로 모았다.
유지계는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연계시키는 통로였다.



- 한인사회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북돋우다.

  경술국치를 전후로 선각자들은 독립전쟁을 도모하기 위하여 망명길을 떠났다.
김영학도 1910년 4월경 북간도로 향했다.
곧바로 간민교육회에 가입한 후 명동학교를 비롯한 민족교육 시행에 혼신을 기울였다.
민족교육에 적합한 역사교과서로 ·「조선역사」·「유년필독」·「대동역사략」·
「월남망국사」·「최신동국사」·「오수불망」·「안중근전」·「이순신전」
등을 선택하였다.
이는 통감부 시기는 물론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배포를 금지당한 ‘금서’였다.

  한편 간민교육회를 확대한 간민회 주요활동은
호구조사사업·토지매매 참여·교육활동 등이었다.
교육활동 중 창가교육은 민족정신과 국민정신을 진작시키기 위함이었다.
상무정신을 고취시키려는 체육교육도 강화하였다.
체육활동은 학생들에게만 그치지 않고 한인들 모두가 참석한 연합대운동회로 이어졌다.
춘계와 추계로 개최된 연합운동회는 군사훈련에 버금가는 병식체조 등을 가미했다.
독립정신과 항일의식은 부지불식간에 학생들 뇌리에 각인되었다.

  1919년 3월 13일에는 용정에서 독립선언축하회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는 현지 3·1운동 확산에 기폭제 역할을 수행했다.
이어 나자구 삼도하자에서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독립만세시위의 확산에 힘썼다.
연길현 국자가에서는 조선국민의사회의 회장이 되어
「조선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4월 말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호응하여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했다.
1928년 말 서울에 들어왔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영학은 출옥 후에도 북간도로 돌아가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한인사회 지도자로서 역할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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