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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분노, 남강에서 활활 타오르다
관리자  2016-03-27 21:42:56, 조회 : 763, 추천 : 96

  3·1운동 당시 진주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인 수부였다.
읍내를 관통하는 남가람(남강의 옛 지명)은 주민들 젖줄이자 상징이다.
각지에서 전개되는 만세운동은 애국청년들을 각성시켰다.
이강우, 김재화, 김영조, 강달영, 강상호 등은
3월 10일경부터 비밀회합을 거듭하면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독립선언서와 격문 등을 인근 지역으로 비밀리 배부하여 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태극기도 만들었다.
거사일은 장날(음력 2일과 7일)인 3월 18일 11시로 정했다.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사립광림학교 악대를 동원하는 데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
시위대는 3조로 편성하여 조직적인 시위운동을 모색하였다.
드디어 오후 1시, 이영규는 비봉산에서 우렁찬 나팔을 불었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만세 함성은 천지를 진동했다.
군중은 애국가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진출하였다.
벅차고 감격적인 순간을 맞았다.


- 노동독립단과 걸인(乞人)독립단이 등장하다

  오후 4시경에는 시위군중이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이를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더러운 물을 퍼붓고 곤봉으로 구타를 서슴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는 잉크를 뿌려 주동자 300여 명을 검거하였다.
군중들은 물러서지 않고 곳곳에 봉화를 올리는 등 분위기 반전에 나섰다.

  이때 ‘노동독립단’과 ‘걸인독립단’이 시위현장에 나타났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걸인독립단 대표는 “우리들이 유걸(流乞, 돌아다니며 얻어먹는다는 의미)하게 된 것은
왜놈들이 우리 삶의 이권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
2천만 동포가 모두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라는 감격적인 연설을 했다.
이는 항일의지를 북돋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 논개의 후예를 자처하다

  이튿날 상점이 모두 철시한 가운데 7천여 군중들은 도청과 경무국 앞으로 몰려나왔다.
시위대와 일본 군경사이에 치열한 난투극이 벌어졌다.
청년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다.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일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전운이 감도는 긴박하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한편 만세운동을 목격한 기생들은 ‘기생독립단’을 결성한 후
적극적인 참여를 결의하였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주논개(朱論介, 임진왜란 당시 적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한 기생)의
후예이다. 진주 예기(藝妓)의 전통적인 긍지를 잃지 마라!”며 19일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일본 경찰이 저지하자
“임진왜란을 상기하라! 왜병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함성과 동시에 태극기를 흔들었다.
한 기생은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하면 한이 없다.”고 격정적인 열변을 토했다.
왜적 침략에 맞선 논개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현장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이날 검속된 기생 32명 중 6명은 진주지방 검찰청에 송치되었으나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 백정 아낙네들이 투혼을 발휘하다

  3월 19일 기생들 시위운동은
사회적으로 가장 천대받는 백정 아낙네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식육점에서 사용하던 칼을 들고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너도 칼, 나도 칼이다.”라며 저지하는 일본 헌병에게 칼을 휘두르며 위협하였다.
번득이는 칼날로 인해 기마대 말들도 미쳐 날뛰었다.
무시무시한 살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군중은 용감무쌍한 이들에게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일제는 현장에서 체포한 아낙네들에게 칼로 이마에
‘에다(백정의 일본어)’라는 낙인을 찍었다.
이들은 피흐르는 이마를 치마폭으로 싸매고
경찰서에 구속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징역살이보다 더 악독한 가슴 아픈 역사현장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준 애국적인 활동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 3·1정신으로 되살아나다

  걸인, 기생, 백정은 강고한 인습으로 사회적인 천대를 받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사회구성원으로 자기 역할에 소홀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좋아도 내 나라, 싫어도 내 나라,
구박을 받고 살다가 죽어도 이 땅에 묻힐 우리다!
우리도 2천만의 한 분자이다.”
그렇다. 자신보다는 조국이 우선이었다.

  3·1운동에서 이들의 참여와 역할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인식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1923년 진주에서 강상호, 장지필, 신현수 등을 중심으로
신분해방과 계급해방을 표방한 형평운동이 시작되었다.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선언’인 셈이다.
역사적인 진전은 이러한 배경과 맞물려 가능할 수 있었다.
기생 논개의 원혼을 달래는 개천예술제 개최 등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인식 변화와 더불어 기생은 예능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오늘날이다.
참된 3·1정신은 조국 독립을 향한 정신이자 민주화 정신의 밑거름임을 상기하자.

                                                                  월간 독립기념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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